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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주머니

벤담과 공리주의-‘다수의 행복’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by 생각하는 유선생 202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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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친구와 점심 메뉴를 고를 때,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 심지어 시험 범위를 정할 때도 우리는 ‘무엇이 더 좋을까?’를 고민하지요. 그런데 ‘좋다’는 기준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제러미 벤담이라는 철학자가 제안한 공리주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행복을 숫자로 셀 수 있을까?

벤담은 18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의 목적은 결국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철학을 요약합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최대한의 행복을.”

공리주의는 바로 이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행동이 옳은가를 판단할 때, 그 결과가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행복을 주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죠. 벤담은 심지어 행복을 수치로 계산하려 했습니다. 고통과 쾌락을 측정해서 ‘쾌락 계산법’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친구의 비밀을 폭로해서 많은 사람들이 웃게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친구는 상처를 받았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즐거웠습니다. 공리주의는 이런 상황에서 전체의 행복 총량을 따져서 그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합니다. 다수의 행복이 크다면, 그것은 옳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다수의 행복’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벤담공리주의는 ‘다수의 행복’만을 중시하다 보니, 소수의 고통은 무시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악마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여주며 그들을 즐겁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환상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숨어 있습니다. 이처럼 다수의 기쁨이 누군가의 눈물 위에 세워질 때, 과연 그것은 정의로운 것일까요?

벤담 이후에 등장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이 점을 비판하며, 단순한 쾌락의 양보다 쾌락의 질도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돼지가 되는 것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낫다”는 말로 공리주의의 더 깊은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선택, 모두의 행복을 위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공리주의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장기를 이식받을 환자를 결정할 때, 국가 예산을 어떤 사업에 배분할지 결정할 때, 우리는 종종 벤담의 방식처럼 전체의 이익을 계산합니다.

하지만 이 기준이 언제나 옳은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어떤 학생이 학급 회장을 뽑을 때, 다수의 지지를 받은 학생이 반드시 모두에게 좋은 회장이 되는 것은 아니듯, 행복의 총량만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가치들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은 산술이 아니다.” – 라오스(Laotse)

이처럼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모두를 위한 최선’이란 무엇인가? ‘옳은 선택’은 언제나 다수의 행복에 근거할 수 있는가? 벤담의 철학은 이러한 고민의 출발점이 되어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수의 행복이 소수의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의 권리를 동등하게 고려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