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맛있는 떡볶이를 먹으며 “진짜 좋다”라고 말한 적이 있나요? 또는 책을 읽고 “정말 좋은 이야기였어”라고 느낀 적은요? 이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주 ‘좋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좋다”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일까요? 아니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걸까요?
‘좋음’은 보편적인가? — 플라톤의 이상주의
플라톤(Plato)은 “좋음”이 단지 개인의 취향이나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좋음’이라는 개념이 감각 세계를 넘어선 이데아 세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데아란 현실 세계의 본질적 원형으로, 모든 좋은 것들은 이 ‘선의 이데아’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선의 이데아는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원이다.” – 플라톤, 『국가』
따라서 플라톤에게 “좋음”은 단지 맛있거나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가까운 진리였던 셈입니다. 예를 들어, 정의로운 행동이 ‘좋다’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무의식 중에 선의 이데아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좋음’은 보편적인 가치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음’은 상대적인가? — 니체와 문화 비판
하지만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이와는 정반대의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좋음’이란 사실 사회와 문화가 만들어낸 가치라고 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귀족들은 용기, 자율, 힘 같은 가치를 ‘좋음’으로 여겼고, 나중에 등장한 종교 사회는 순종, 겸손, 희생을 ‘좋음’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가치는 창조되는 것이다. 선과 악도 절대적이지 않다.” – 니체, 『도덕의 계보학』
니체는 우리가 믿는 도덕과 ‘좋음’이란 것이 사실 누가 권력을 쥐었느냐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며, 기존의 도덕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좋음’은 보편적이라기보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규정되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현대의 시선 — ‘좋음’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오늘날 우리는 플라톤처럼 절대적인 진리를 믿지 않지만, 니체처럼 모든 가치를 해체해 버릴 수도 없습니다. 대신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같은 철학자는 “좋음이란 대화와 공감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좋다’고 느껴질 때, 그것은 공동체 속에서 경험을 공유하고 의미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환경을 보호하는 삶이 좋다’고 믿는 이유는 우리가 그 가치를 공유하고, 미래 세대와의 연결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대 철학에서는 ‘좋음’은 고정된 절대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계속 만들어지는 가치로 이해됩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선을 창조한다.” – 리처드 로티
결국 ‘좋음’이란 단어 하나에도 수천 년의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왜 좋은 것이라 느끼는지는 단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사는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좋음"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모두에게 통하는 보편적인 원칙일까요, 아니면 여러분이 살아온 환경이 만들어낸 감정일까요? 오늘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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